예로부터 물은 생명이었다. 물을 다룰 줄 아는 민족은 흥했고 그렇지 못한 민족은 몰락했다. 물의 역사는 한반도에서 농경이 시작된 때부터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관개용 저수지인 제천 의림지는 삼한시대 3대 수리시설 가운데 지금까지 관개 기능을 톡톡히 해내는 유일한 저수지다. 1500여 년 전에 축조된 의림지를 통해 선조들의 지혜를 들여다본다.

최고의 관개용 저수지

의림지는 용두산의 드넓은 품에 아늑하게 안겼다. 봄에는 벚꽃과 수양버들이 푸지게 피고, 여름에는 송림의 넉넉한 그늘이 어우러져 더위를 식힌다. 단풍이 물드는 가을과 삭막한 겨울에는 생명을 이어갈 봄날을 기다리며 인고의 깊은 잠에 빠진다. 사계절 어느 때라도 그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의림지의 본래 목적은 용두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을 막아 둑을 만든 농경을 위한 수리시설이었다. 삼한시대에 축조된 김제 벽제골, 밀양 수산제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관개시설이다. 현재 의림지 둘레는 약 2km, 면적 15만1470m2, 저수량 661만1891m2, 수심 8~13m이다.

구전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 13년(552)에 유명한 악사였던 우륵이 처음 축조했다고 전한다. 우륵이 의림지를 축조했다는 설화를 증명이라도 하듯 의림지에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바위 ‘우륵대’와 그가 마셨다는 우물 ‘우륵샘’이 남아 있다. 당시 이름은 ‘임지’였다. 의림지로 불린 것은 고려 성종 11년(992)에 군현의 명칭이 개정되면서다.

현재까지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고마운 저수지

조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길이 530척(尺)의 큰 방축으로 의림제(義林堤)’라 하여 ‘논 400결(結)에 물을 댄다’고 적혀 있다. 당시 1결의 면적은 9859.7㎡이로 약 3천 평정도 된다. 당시 제천의 전체 논 면적이 559결 점을 생각한다면 70% 이상의 논에 용수를 공급한 셈이다.

농경사회에서 의림지는 사회·지리적 기준이었다. 조선 시대 규장각 도서 《하삼도(下三道)》에 의하면 제천 의림지 서쪽을 호서(湖西)지방이라 하여 지역을 나누는 기준으로 삼았다. 의림지는 선조들의 우주관을 담았다. 조선 후기 화가 이방윤의 서화첩 ‘사군강산삼선수석(四郡江山參僊水石)’에 표현된 의림지도는 정사각형의 모습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의림지는 역사 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충청투데이 2012년 6월 22일자 제19면 기사에 따르면 “낮은 저수율 탓에 전국적인 농작물 피해가 잇따르고 있지만, 수천 년이 지난 현재에도 수리시설 역할을 해내고 있는 의림지 덕에 제천지역의 가뭄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다”라고 밝혔다.

의림지가 수천 년을 지나오면서 아직도 건재한 이유는 풍부한 수원(水原) 때문이다. 김종수 세명대 외래교수의 학술 논문집을 정리·보도한 충북일보 의림지 관련 기사를 보면 ‘의림지의 수원으로 용두산의 계곡수가 있고 더불어 저수지 맨 밑바닥의 기층부위에서 샘솟는 샘물원을 하나 더 갖고 있다’라고 한다. 이처럼 두 개 이상의 수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수량이 일정하고 수질 또한 비교적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의림지의 풍부한 저수량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제방축조와 수문 시설 등 앞선 토목 기술도 필요했을 것이다. 게다가 의림지는 고대 수리 시절 가운데 유일하게 해발 300m가 넘는 고지대에 있는 데다 두 개의 저수지가 연결된 이중 구조라는 특징도 갖고 있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의 뛰어난 수리 기술로 만들어진 의림지는 위대한 유산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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